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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공(文莊公) 매계(梅溪) 조위(曺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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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10 12:58 조회14,2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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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묘지기행(1)



문장공(文莊公) 매계(梅溪) 조위(曺偉)



김천시 대항면 복전리 속칭 말개미 마암산 창녕조씨 선영에는 점필재 김종직의 학통을 잇는 조선전기 명문장가로서 문명을 떨쳤던 매계 조위선생의 유택(幽宅)이 자리하고 있다.


cemetery1-1.jpg

매계는 1454년(단종2) 봉산면 인의동에서 울진현감 조계문(曺繼門)과 문화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종숙부인 영의정 충간공과 매형인 점필재 김종직에게서 수학했는데 21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수찬과 승정원 동부승지, 도승지, 성균관대사성 등 당대의 대석학이 임명되는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당대의 선비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던 신진사류의 지도자로 명성을 얻었다.


cemetery1-2.jpg

▲매계 조위의 출생지인 율수재


특히 홍문관 수찬으로 재임할 때에 성종의 명으로 승(僧) 의침(義砧)과 함께 당나라 두보의 시를 번역하여 두시언해(杜詩諺解)를 편찬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성종은 일찍이 선생을 총애하시어 “백관중 문예는 매계가 단연 으뜸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1498년(연산군4) 유자광(柳子光)등의 주동으로 야기된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선생은 의주와 순천으로 유배되어 고초를 겪게 되는데 병을 얻어 1503년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나라에 대한 애끓는 충정은 적소(謫所)에서도 변하지 아니하여 유배가사의 효시(嚆矢)인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하기에 이른다.


“천상 백옥경이 어디멘고. 오색운 깊은 곳에 자청전이 가렸으니 구만리 먼 하늘을 꿈이라도 갈똥말똥. 차라리 죽어서 억만번 변하여 남산 늦은 봄에 두견의 넋이 되어......”(만분가 중에서)


뒷날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 선생의 죄를 다시 묻는다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를 거듭 당하고 3일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같은 정황과 관련하여 무오사화 직전 선생의명나라 사행길에 역관(譯官)으로 동행했던 동생 적암(適庵) 신(伸)이 요동의 점쟁이 추원결(鄒源潔)에게서 들은 “천층 물결속에 몸이 뒤집혀 나오고 바위밑에서 사흘 밤을 잠들기 기다린다”라는 점괘가 그대로 맞았다하여 당시 유생들 사이에 크게 회자되기도 했다.


이 일화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에서도 매우 흥미롭게 다루어지고 있다.


뒷날 1506년(중종원년) 중종반정 이후 선생의 죄가 사면되어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고 1708년(숙종34) 대제학이 더해지고 문장공(文莊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마암산 선영의 매계선생 묘소위로 자리한 어머니 문화류씨 묘역에서 수년전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로 지정 되었는데 매계와 절친했던 명문장가 호조판서 홍귀달(洪貴達)이 찬(撰)했다.


홍귀달은 지석명문에서 “매계가 내게 말하길 어머니께서 평생을 아름다운 덕으로 사셨는데 이것을 글로서 후세에 전하고자 우리 집안 사정을 잘 아는 그대에게 부탁하니 사양하지 말아주시오”라했다고 적고 있다.


선생의 매형이며 스승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매계와 더불어 강론하면 마치 큰 강물이 도도히 흘러 막힘이 없다”라고 했고 선생의 절친한 벗이며 사화때 함께 고초를 겼었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선생의 재주와 생각은 일찍이 꽃봉우리처럼 날아오르고 그 명성이 온 나라에 진동했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은 고향사랑 또한 각별하여 바쁜 나랏일 중에도 김산 동헌가 중수되자 기문(記文)을 지어 보내고 충청감사로 재임시 지례현을 지나다 인근의 고향땅을 생각하며 애틋한 시를 짓기도 했다.


옥 같은 꽃송이 비단을 매달아 놓은 듯


봄바람은 분명 한 해의 꽃소식을 관장하니


정년 올해에도 강남의 소식 있을 것이니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이미 절반은 집에 이르렀다


조선초 영남제일문향을 선도했던 김천이 낳은 큰 선비 매계 조위선생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마 아까운 기량을 다 펴지 못하고 스러져갔으나 문화예술의 도시 김천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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