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와(南窩) 강설(姜渫)과 기재(耆齋) 강여호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18 23:59 조회15,759회 댓글0건본문
김천묘지기행(11)
남와(南窩) 강설(姜渫)과 기재(耆齋) 강여호
감천면 용호리 복호동 고당산 자락에 조선중기 향현(鄕賢)으로 이름이 높았던 남와 강설과 기재 강여호 부자의 유택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 자리한 재실 모원재(慕遠齋)를 돌아들면 묘소로 오르는 대밭과 솔밭길이 오롯이 펼쳐져있다.
오솔길 끝자락에 두 분의 묘소가 소나무 숲 사이로 소박하게 계신데 남와공의 묘소앞에 선 문인석이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른 아침을 깨우려는 듯 사뭇 근엄하다.
남와공 부자의 묘소는 고당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엎드린 호랑이 형상으로 알려진 당산과 맞은편 샘골을 청룡과 백호로 했는데 멀리 감천에 합류하기 직전의 남천(南川)을 임수(臨水)로 하고 너머의 염속산을 안산(案山)으로 삼았다.
남와공은 진주강씨로 김천도찰방을 역임한 강부(姜符)의 손자로 군자감참봉 강해로(姜海老)와 고성이씨부인 사이에 1583년(선조16) 충청도 회덕에서 태어나 자를 정보(淨甫),호를 남와라 했다.
1612년(광해군4)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한 후 1616년 대과에 응시하러 상경하던 중 과거시험장이 부정으로 얼룩졌다는 소문을 접한 후 “과거가 사람을 욕되게 한다. 청백리의 후예로써 시험에 응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며 그 길로 향리로 돌아와 급제의 뜻을 접고 학문에만 정진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배상룡(裵尙龍)이 공을 칭송하며
“과거는 갈림길이 많으니 향기로운 미끼 따라 분주히 옮겨감을 일찍이 보았다”라고 했다.
1625년(인조3) 양친상을 맞아 3년간 시묘한 후 “영남은 이름난 배출하는 추로(鄒魯)라 칭하니 어찌 가서 살지 않으리오” 하며 1628년(인조6) 마침내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처향(妻鄕)인 김산군 기를로 이거했다.
오직 학문과 육영에만 정진하던 공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김산향교의 중건에 전념하다 1651년(효종2) 69세를 일기로 졸했다.
남와공은 부인 성산여씨와의 사이에 3남5녀를 두었는데 장남 여구는 생원으로 남와공의 뒤를 이어 김산향교를 중수했고 차남 여율은 진사였다.
삼남 여구는 1620년(광해12) 나신 후 자를 계숙(啓叔), 호를 기재(耆齋)라 했다.
1654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 호조좌랑, 평안도도사, 병조좌랑, 사간원정언, 진주목사, 나주목사, 이조참의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며 명망을 얻었는데 임기를 마치고 이임지로 떠나는 남와공을 백성들이 서로 모시겠다고 다툼이 있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특히 횡성부사로 재임할 때에 집안에 혼사가 있어 쌀 넉 섬을 변통해달라는 전갈을 받고 “사사로운 내 집의 결혼비용에 국고를 덜 수는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로 유명하다.
공은 효종, 현종, 숙종 세분의 임금을 모시며 청백리로서 충언을 스슴지 않았고 만년에 선친의 유훈을 받들어 김산향교 중건에 기여하여 이 고장 흥학 육영에 공을 세우다 1682년(숙종8) 63세를 일기로 졸했다.
<글/김천문화원 송기동>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