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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례 고을의 참스승 장지도(張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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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19 00:35 조회15,4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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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묘지기행(17)


지례 고을의 참스승 장지도(張祉)


지례면사무소 뒤편에 있는 사찰, 정수암을 지나 등산로를 따라 30여분을 오르면 구산(龜山)을 넘나들던 정성고개 너머에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지례로 낙향해 고을의 인재양성에 힘쓴 반곡(盤谷) 장지도(張祉)의 묘소가 있다.


cemetery17-1.jpg


구산 정상으로부터 지례면 도곡리 도래실마을방향으로 난 배암골자락에 자리한 공(公)의 묘소는 구산을 주산으로 하고 속칭 자부랑모티로 이어지는 야산을 좌청룡으로, 댓골을 우백호로 하여 부항천까지 감싸고 있다. 또 부항천을 넘어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삼방산을 안산으로 삼았다.


장지도는 옥산장씨로 수원부원군 장을포(張乙浦)의 손자로 1371년(고려 공민왕 20년) 지례 거물리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한 후 고려조정에서 기거주지의주사(起居注知宜州事), 조선 건국 초에 종4품의 소감(少監)직에 올랐으나 태종 조에 이르러 골육상잔의 참극을 목격한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낙향 후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시가 전한다.


“천년 반곡은 평평한 방안 같고 깎아지른 앞산은 석성을 이루었네. 예부터 몇 집이나 대를 이어 살아 왔던가? 오늘에 이르러 열 집이나 관직을 얻었네. 처마 밑 드리운 감과 밤은 산중의 진미요, 문에 걸린 구름은 세상의 인정을 잊게 하네. 출세하다 버림받음을 원망하지 마라. 편안하고 한가한 손님이 자연과 친구가 되었지 않은가.”


이 시를 통해서 볼 때 장지도는 조선왕조에 종사할 뜻이 없으며 과감히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낙향해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겠다는 불사이군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장지도는 향리인 거물리 반곡(바람실)에 서당을 열고 제자들을 길러내어 지례현의 향풍을 쇄신하고 문풍을 진작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제자들 중에서 윤은보(尹殷保)와 서즐(徐騭)의 학문이 출중했는데 두 사람은 아들이 없는 스승 장지도를 위해 어버이의 예로서 봉양을 하여 훗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은보감오(殷保感烏)’라는 제목으로 그 효의 행적이 수록되어 지례의 명성을 드높인다.


다음은「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린 장지도와 윤은보, 서즐의 행적이다.


知禮縣人尹殷保, 徐騭, 俱學於同縣知宜州事張祉, 一日相謂曰,“人生於三, 事之如一, 況吾師無子可養乎?” 得異味輒饋 每遇良辰, 必具酒饌, 如事父然. 張沒, 二人請廬墓於其親, 親憐而聽之. 乃玄冠腰絰, 居墓傍. 躬爨供奠, 尹父嘗病, 卽歸奉藥, 依不解帶, 父愈, 令復師廬. 月餘尹感異夢, 亟歸則父果異夢夕病作, 未旬而死. 尹晨夕號哭, 不離喪側, 旣葬, 廬父墳. 一日飄風暴起, 失案上香盒, 數月有烏銜物, 飛來置塋前, 人就視之, 卽所失案上盒也. 至朔望酋奠張墳, 徐終三年, 宣德壬子, 事聞, 殷保 騭, 竝命旌門拜官


譯)지례현의 윤은보와 서즐은 같은 고을 지의주사벼슬을 한 장지도에게 배웠다. 하루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람으로 태어나 임금과 어버이와 스승은 섬기기를 하나같이 하라 했는데 우리 스승이 아들이 없으니 우리가 봉양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문득 맛있는 것이 생기면 스승에게 먼저 드리고 명절이면 술과 반찬을 준비해 어버이와 같이 섬겼다. 장지도가 돌아가시자 두 사람은 아버지에게 여묘살이 할것을 청하니 아버지는 가련하게 여겨 허락했다. 이내 상복을 입고 묘옆에서 살면서 몸소 음식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윤은보의 아버지가 병이드니 곧 돌아가 약을 올렸는데 이때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한달여가 지나서 윤은보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급히 집에 돌아가 보니 아버지가 병이 들어 열흘이 되지 않아 별세했다. 윤은보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곡을 하면서 한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장례를 치른 후 아버지 무덤에 여막을 지었다. 하루는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더니 향로가 날라 갔다. 몇 개월 뒤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날아와 무덤 앞에 두었는데 살펴보니 잃어버린 향합이었다. 삭망이 되어 장지도는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서즐도 3년상을 마쳤다. 1432년에 이 일이 세상에 알려져 윤은보와 서즐에게 정려와 벼슬이 내렸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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