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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학산 낙동대감 류후조(柳厚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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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18 23:37 조회12,9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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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묘지기행(2)



관학산 낙동대감 류후조(柳厚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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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개령면 서부리와 동부리, 양천리를 품고있는 감문산은 삼한시대의 이 지방 소국인 감문국의 진산이자 감문산성으로 인해 위난시 백성들의 피난처로서 성황산(城隍山)으로도 불리며 지역민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아온 신산(神山)이다.


따라서 감문산에는 묘소를 들이지 않는 것이 누대로부터 불문율처럼 인식되어 왔는데 이를 어기고 암장(暗葬)하였다가 지역민의 식수원인 동부리 마을앞 쌍샘이 핏빛으로 변함으로 인해 번번이 발각되어 혹독한 망신을 당하였다는 일화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풍수지리로 볼 때 감문산은 호형(虎形) 즉 호랑이상로 일컬어지는데 많은 감문산의 봉우리들 중 호두산(虎頭山)이 범의 머리에 해당하고 머리가 향하는 감천 맞은편의 아포 대신리 한골에 끝없는 흉사가 일자 직지사를 창건하기위해 선산과 김천을 내왕하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호랑이의 기세를 누르기위해 심장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짓고 호랑이와 상극인 닭을 기르며 절 이름도 계림사(鷄林寺)라 했다는 이야기가 그래서인지 더 신비롭다.


많은 전설을 품고 있는 명산 감문산이 빗겨 흘러 그 정기가 모인봉우리가 곧 관학산(冠鶴山)으로 조선후기의 명재상 낙동대감 낙파(落波) 류후조선생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산의 형세가 학이 관을 쓰고 있는 것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관학산은 역마고개를 거쳐 유동산까지 이어지고 감천을 넘어 아포 제석봉과 금오산을 마주하는 명당터로 알려져 왔다.


관학산이 갖는 명성은 예부터 개령지방 토호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양천허씨와 단양우씨 집안에서 대저택을 앞다투어 이 산 자락에 지었으며 고종때 영남인으로서는 실로 2백년만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상주인 유후조선생이 고향이 아닌 이곳 개령땅을 유택(幽宅)으로 정한 사실만으로도 관학산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류후조는 풍산류씨로 선조때의 명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8대손으로 1798(정조22년)에 상주에서 태어나 부호군, 이조참판, 공조판서를 두루 거쳤다.


절치부심(切齒腐心) 끝에 집권에 성공한 흥선대원군은 계속된 세도정치의 폐단을 끝내려는 자신의 정치력을 뒷받침할 인물로 1866년(고종3년) 당시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문가의 후손인 유후조를 일약 우의정으로 발탁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합천출신의 남인계 영의정 정인홍(鄭仁弘)이 사사되고 뒤이어 1680년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계 영의정 허적(許積)이 사약을 받는 등 조선중기 이후 경상도 남인은 철저히 정권으로부터 소외되어왔다


따라서 유후조가 정승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개인만의 영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694년(숙종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들이 완전히 정계로부터 밀려난 후 실로 170년 만에 경상도 남인의 정계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셈이다.


우의정으로 임명된 그해에 유후조는 고종의 가례(嘉禮)를 알리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가 1872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 퇴임하기까지 청백리(淸白吏)로서 명망을 얻었다.


퇴임 후 고향인 상주 중동 우물리로 은거 했을 때 전국의 문사들과 대소 관리들이 문안 인사차 마을을 찾아들자 방문객들의 불편을 줄일 요량으로 낙동강가의 나루터로 집을 옮겨 살 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과거시험을 보러가던 한 젊은 선비가 강가에 소일하던 한 노인을 불러 등에 업혀 낙동강을 건넌 후 유정승댁을 일러달라고 했더니 “내가 그 노인이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후 낙동대감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하니 공의 소탈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동안 관학산에 있던 개령향교 터를 탐낸 유정승이 자신의 묘소를 들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향교를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기도 했는데 1989년 대성전 중수시 발견된 『개령향교신축중수이건기문』에 1866년에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선생의 졸(卒)한 연도인 1875년과는 상당한 연차가 났음이 밝혀져 애꿎은 누명을 벗게 되었다.


기문이 아니더라도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일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유정승과 그 후손이 사익을 위해 유학의 지방본산인 향교를 사사로이 이전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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