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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절공 남정 김시창(金始昌)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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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19 00:44 조회4,1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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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묘지기행(22)


효절공 남정 김시창(金始昌)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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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풍김씨 집성촌인 봉산면 신암리 고도암마을입구에 들어서면 김시창선생을 기리는 정려각이 먼저 이방인을 맞는다. 옛날 마을 뒤에 있는 신암역에 기차가 정차했을 때만해도 많은 인파로 붐볐을 마을로 오르는 길이 무수히 떨어지는 가을낙엽만큼이나 적막하다.


경부선 철도 밑을 가로지르는 좁다란 굴다리를 지나 3백여 미터를 더 오르면 자그마한 저수지가 더 이상 찻길이 없음을 알린다. 도보로 가성산 자락 전나무골을 따라 백여 미터를 더 오르니 학문에만 정진하며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 처사(處士)임을 자랑으로 살다 간 참 선비 김시창과 배위인 단양우씨부인의 묘소가 있다.


공의 묘는 가성산을 주산으로하고 삼밭골을 좌청룡, 불당골을 우백호로 하여 태평마을 뒷산인 덤밭골을 안산으로 삼았다. 김시창은 해풍김씨의 시조로 고려때 예부상서를 지낸 해풍부원군 김숭선(金崇善)의 후예로 조부는 사직(司直)벼슬을 지낸 정효신(鄭孝信)이다. 1472년(성종3년) 대항면 대룡리에서 부친인 정의(鄭顗)와 모친인 하산조씨부인 사이에 태어나 자를 정양(鄭楊), 호를 남정(嵐亭)이라 했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고도암마을로 이거했는데 15세되던 해에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사헌부 감찰과 덕원부사를 지낸 송숙기(宋叔琪.1426-1489)를 만나 인생의 나아갈 길을 물으니 “천성을 지키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의미인 “存養省察(존양성찰)” 네 글자를 적어주어 공은 이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515년 모친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는데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포효함에 문중어른들이 모두 호환이 두려워 시묘 중단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태연자약했고 뒤에 호랑이가 공을 태워 주기까지 하니 주위에서 호랑이까지 감화시킨 큰 효자가 나왔다고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한다.


151 8년 (중종13년)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과 1519년 조광조(趙光祖)가 효행과 학행을 예로 들어 현량과로 추천하여 제릉참봉과 사직서 참봉 벼슬이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당시 벼슬을 사양하며 쓴 글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속이니 부끄럽고 두렵다. 오늘에 이르러 두 번이나 왕명으로 불리어 영광은 비록 지극하나 나의 분수를 헤아려보니 돌아올 이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맑은 조정의 공기를 더럽힐 뿐이다”


또 남취정(嵐聚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선비들과 학문을 논했는데 어느날 지역출신으로 당대의 문신으로 이름이 높았던 조위(曺偉)와 이약동(李約東)이 방문하자 “자연의 경치를 그대들과 함께 평생토록 볼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자연과 벗하며 살고 있음을 오히려 당당해했다.


공은 충신으로서도 이름이 났는데 관리가 아니면서도 성종, 중종, 인종이 승하한 국상때 마다 3년간 상복을 입고 예를 갖추었고 특히 중종임금이 승하하자 70이 넘은 고령이었음에도 날마다 북쪽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가 사사될 때 공의 아들이 연루되어 유배를 가자 세상과 단절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평생 관직에 나아기지 않았음에도 높은 학문으로 김종직, 조위 등과 함께 영남사림파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


1558년(명종13년) 86세를 일기로 공이 졸하자 명종임금은 예관을 보내어 애도하고 효절(孝節)이라는 시호와 함께 정려를 내렸다. 유곡도찰방을 지낸 송량(宋亮)이 행장을, 성균관대사성 정유번(鄭維藩)이 묘갈명을 지었으며 묘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찬(撰)했는데 비석은 모두 사라지고 받침돌만 남아있다. 후에 공의 위패가 김천의 경렴서원과 황간의 송계서원에 배향되고 그 행적이 정조 때 간행된 「삼강록(三綱錄)」에 수록되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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