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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의병장 학촌(鶴村) 박이룡(朴以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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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18 23:51 조회5,7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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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묘지기행(7)


임란 의병장 학촌(鶴村) 박이룡(朴以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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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역이 있는 대항면 덕전리 세송마을에서 길고 좁다란 경부선 철로 굴다리를 통과하면 임진왜란때 황의장으로 불리며 김산벌을 호령했던 의병장 학촌 박이룡장군의 신도비와 사당 학촌재가 우뚝 서있다.


신도비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증손자이며 당대의 명문장가인 영의정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1717년 비문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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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으로부터 좁다란 농로를 따라 한참을 오르면 뒤로 덕대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멀리 극락산을 안산(案山)으로 하는 세송산 자락에 학촌선생과 배위되시는 밀양박씨의 합분이 오롯이 자리 잡고 있다.


선생은 충주박씨로 1533년(중종28년) 8월15일 서울에서 영천부사를 역임한 박성건(朴成楗)과 흥덕장씨의 7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자를 시윤(施允), 호를 학촌(鶴村)이라 했다.


어려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61년(명종16) 진사시를 거쳐 1577년(선조10)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77년(선조10)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그 이듬해 예조정랑(禮曺正郞),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1580년(선조13)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선생은 사간원정언으로 봉직하면서 당시 동,서로 나뉘어 분당에 골몰하는 관리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릴 정도로 강직한 성품을 지녔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583년(선조16) 모친상을 당하여 동생과 더불어 5년간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밤낮으로 지켜 주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선생의 효성과 높은 학문이 알려져 각계의 추천으로 선조가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591년(선조24) 59세에 해서순찰사(海西巡察使)라는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무고(無告)로 인해 1592년 원주로 유배를 당했다.


이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면을 받고 향리인 황간으로 돌아와 친척과 마을의 장정 5백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해 군호(軍號)를 황의장(黃義將)으로 칭하며 당시 왜군 후방사령부로서 4만명이 주둔하던 격전지 개령을 공략하기 위해 김천 하로마을에 진을 쳤다.


선생은 김천일대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여 전공을 세웠는데 첫 번째 전투인 부상고개에서 영동군수 한명윤(韓明胤), 상주목사 김해(金邂), 상주판관 정기룡(鄭起龍) 등과 합세하여 3차례의 공방전 끝에 적을 물리쳤다.


1592년 10월초에는 지례전투에 참가하여 1500명의 왜병을 몰살시키는 전공을 거두었으며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김면(金眄),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등과 성주성 공격에 나서 홀로 적병 20여명의 수급을 베기도 했다.


또 개령에 주둔했던 적병이 공자동과 우두령을 넘어 거창으로 진격하려는 것을 막기도 했는데 1593년 1월 부상전투에 참가해 분전하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때 말에서 떨어져 적의 포로가 될 지경에 이르렀으나 영동군수 황명윤과 강절(姜節)이 도와 목숨을 건졌다.


나라에서 능성현령과 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듭 재수하여 능성현령으로 봉직하다가 1593년 4월 30일 지난 부상전투에서의 부상이 덧나 능성현 관아에서 63세를 일기로 순직하고 말았다.


교남지(嶠南志)에 “박이룡은 충주인으로 율곡 이이의 문하생이다. 문과에 진출하여 현감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동생과 함께 시묘살이를 할 때 호랑이와 함께 했다. 사람들이 벼슬을 주고자 하였으나 사양하고 임란 때 의병을 모았고 정호가 비를 세웠다.”라고 적고 있다.


선생이 졸하자 전라감사가 관군을 동원해 영동군 원평으로 시신을 운구해 반장 했다가 문중에서 1615년 황간현(현 김천시 대항면 덕전리) 세송산으로 이장했는데 1940년 경부선철로를 복선화할 때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장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의 12대손인 박해근(82세)씨에 따르면 영동에서 세송산으로 이장할 때 유명한 지관이 “이 자리는 물 없는 배가 지나갈 자리이다”라고 해서 모두들 의아해했는데 세월이 흐른 후 기차길이 나면서 다시 이장하게 되어 모두들 신기해했다고 한다.


1812년(순조12) 영, 호남 사림들의 상소로 이조참의로 증직이 되었으며 1991년 매곡면 공수리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선생은 사친(事親),사군(事君),사형(事兄) 등 3남 1녀를 두었는데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부친을 따라 김천땅에 정착한 이래 봉산면 태화리 가매기 마을에 차남인 사군(事君), 대항면 복전마을에 삼남인 사형(事兄)의 후손들이 집성을 이루어 살고 있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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