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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강공(孝康公) 적암(適庵) 조신(曺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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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0-18 23:55 조회14,1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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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묘지기행(9)


효강공(孝康公) 적암(適庵) 조신(曺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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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조의 명신(名臣)으로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를 최초로 언해한 두시언해(杜詩諺解)와 유배가사의 효시(嚆矢)로 평가받고있는 만분가(萬憤歌)를 집필한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출생지인 봉산면 인의동에는 매계의 서제(庶弟)이며 당대의 또 다른 명문장가 효강공 적암 조신의 유택(幽宅)이 자리하고 있다.


매계 구거(舊居)에 세워진 율수재(聿修齋)가 있는 극락산자락 당동(堂洞)으로부터 야산 하나를 사이로 나뉘어있는 속칭 여리동 니릿골 사인봉(舍人峯)에 터를 잡은 적암의 유택은 극락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봉계 앞 동산(東山)을 안산(案山)으로 삼았다.


비닐하우스 행렬을 뚫고 널찍이 닦여진 산자락을 따라 오르니 무수한 참나무의 행렬이 호위무사인 냥 도열한 가운데 적암과 부인 영월엄씨의 묘소가 고하비상(考下妣上)으로 모셔져있다.


효강공은 창녕조씨로 1454년(단종2) 울진현감 조계문(曺繼門)의 서자(庶子)로 서형(庶兄) 매계 조위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자는 숙분(叔奮), 또는 숙도(叔度)라 하고 호를 적암(適庵)이라 했는데 어려서부터 매계와 더불어 매형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에게 수학하였고 20세에 직지사 능여암으로 들어가 두문분출하고 학업에 정진했다.


서출(庶出)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절감한 적암은 일찍이 일본어와 중국어등 외국어를 독학하여 역관(譯官)의 길을 걸었다.


호학군주였던 성종은 서얼 출신이며 역관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계와 함께 문명이 높았던 적암을 수시로 불러 함께 학문을 논하고 상을 내리곤 했다.


적암은 이때마다 빼어난 문장과 외국어 실력으로 성종을 놀라게 했고 외국의 사신이 올 때마다 필찰(筆札)을 책임지는 외교문서 전문가로서의 위치를 일찌감치 굳혔다.


5개 국어에 통달한 적암은 당대의 명신 신숙주(申叔舟)의 요청으로 일본 통신사 행렬에 역관으로 수행한 이래 명나라 7회, 일본에 3회에 걸쳐 다녀왔다.


특히 명나라에서 안남국(安南國.베트남) 사신과 주고받은 시문으로 인해 적암의 문명(文名)이 동남아에까지 알려졌으며 성종은 역관으로서 외교에 큰 공을 세운 적암을 파격적으로 종3품의 사역원정(司譯院正)으로 특진시켰고 훗날 중종은 당상(堂上)의 품계를 내리고자 하였으나 서얼신분에 과하다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중종(中宗)의 명으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시작하다 경상도관찰사로 옮기면서 중단되었던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의 책임을 맡아 편찬을 완료 했을 만치 역관 적암은 대학자로서의 면목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대 최고의 역관이자 문장가로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적암은 1498년(연산군4) 매계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유배를 당하자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한다.


뒤에 전라도 순천 적소(謫所)에서 매계가 병사하자 시신을 운구하고 장사지낸 것 또한 적암이었을 만치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봉계로 낙향한 뒤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는데 금시헌(今是軒)이라는 당(堂)을 짓고 정여창, 박상, 이행, 권민수, 이항, 홍언필 등 당대의 석학들과 폭넓은 교류를 나누었으며 적암시고(適庵詩稿), 소문쇄록, 백년록(百年錄)을 저술했다.


1529년(중종24) 75세를 일기로 공이 졸하자 나라에서는 서출인 역관 신분인 적암에게 파격적으로 공조판서를 추증하고 효강(孝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은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에서 말년에 자신이 청운의 뜻을 품고 서형 매계와 함께 수학했던 직지사에 다시 들러 지난날을 회고하는 유명한 시 한수를 남겼다.


직지사


그윽한 숲속 직지사는 큰 도량인데


성쇠 생각하니 일마다 이는 감상.


고승 있을 때는 승려도 많더니만


은혜입고 늙어 돌아가니 보광전도 황량하다.


송죽은 빈 하늘을 찔러 섰고


구름산만 우뚝 솟아 창창하기만 하다.


현감 모신 이 자리


잔 기울여 도연명의 국화주를 들도다.



<글/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송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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